갈리폴리(gallipoli) 반도는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만 반도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이었던 러시아로 연합국 측이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갈리폴리 반도를 가로지르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야만 했다.
지도에서 보면 다르다넬스 해협은 좁은 구간이 1km 밖에 안될 만큼 협소한 해협이다. 이 해협은 무역로도 중요하였지만, 이곳이 뚫리게 되면 바로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까지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수도 방위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다. 터키는 당연히 이 해협 양안을 요새화하고 대구경 해안포를 설치한다.
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터키는 중립을 지켰으나, 어떤 이유(?)에서 인지 뒤늦게 독일 편이 된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종전이후에 거의 나라가 완전히 망해서 분할되기 직전까지 간다. 아트튀르크 케말 파샤의 활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유지하지도 못했을 수 있다. 영국은 오스만이 내심 자기편에 서기를 바랐겠지만, 어쨌든 오스만투르크가 독일편에 서면서 흑해항로를 차단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이때부터 연합국 입장에서도 다르다넬스 해협은 반드시 장악해야 되는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되었다.
다르다넬스 해전
이 때 영국의 해군장관은 유명한 윈스터 처칠이었다. 처칠은 40세의 나이에 해군성 장관이 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빠른 출세였던 것 같다. 처칠은 야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성향이 자기 발전을 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심 때문에 판단을 그르칠 때도 많다. 누가 삼국지의 제갈량이 활약한 이유는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갈리폴리 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 육해군 합동 작전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프랑스 전역에 자원을 많이 투입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갈리폴리 반도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또 갈리폴리의 상륙지점이 워낙 협소하고 요새화되어 있기 때문에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육군이 미적되는 상황에서, 처칠은 1차 세계대전에서 성과 욕심 때문에 단독으로 해군만으로 다르다넬스로 진격하기로 결정한다.
연합국은 최신 전함을 포함된 100여척의 함선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여 이스탄불까지 진격하고자 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의 해군력은 거의 없다고 간주해도 될 정도였지만, 이 해협 양안으로는 요새화된 진지에 대구경 해안포들이 즐비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심각한 탄환 부족에 시달렸고, 정확한 조준이 불가능하였다. 연합국은 이 해협을 과감히 돌파를 시도하였지만, 이 해안포를 이용해 전함을 격침한 사례는 없었다. 오스만제국은 야간에 소형 함정을 이용해 기뢰를 부설하는데, 대부분의 연합국측 피해는 이 기뢰때문에 발생한다. 연합국은 기뢰에 의해 전함 3척이 침몰하고, 1척이 대파되는 재앙을 맞이한다. 이 당시 전함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오스만제국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본 것이다.
이 전투의 결과로 자신만만하던 처칠은 해군성에서 해임되었고, 또 하나의 재앙이 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갈리폴리 상륙작전
다르다넬스 해협을 해군력만으로 돌파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연합국 측은 육군의 상륙작전을 통해 해안포 진지를 먼저 장악하려고 했다. 갈리폴리 반도 끝 부분과 안작 해안가에 상륙작전이 전개되었다. 상륙작전이라고 하면 던케르크의 장면을 상상하겠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근대 상륙작전의 기본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상륙정도 없어서 보트를 이용해 해안에 접안하였고, 보급품도 역시 보트로 노를 저어 공급하였다.
상륙작전은 갈리폴리 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륙지점의 해안가가 너무 좁고, 적의 고지는 높아서 오스만제국의 화력만 지원되었다면 순식간에 전멸하기 딱 좋은 지형이었다. 아래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유튜브에서 발췌한 안작 해변이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상륙 지점이 너무 좁은데, 여기에 호주군이 수만이 상륙했다.
이 당시 지휘관들이 충분한 정보조사 없이 제한된 정보로 작전을 세운듯하다. 연합국은 2주이면 이스탄불을 장악한다고 자신만만했다고 하던데, 그런 오만함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어떤 대상이던 그 상대방을 입체적으로 이해해야한 적절한 대응 방법이 도출될 수 있다. 삼류 군대로 무시하던 오스만제국군도, 그들만의 특별한 속성이 있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 속성들이 상황과 결합될 때 장단이 나타나는 점인데, 당시 연합국 지휘관들은 이런 입체적 사고가 부족했던 것 같다.
연합국은 지리적인 불리함이 있었고, 오스만제국군은 탄약과 훈련 부족으로 양측 모두 고전하였다.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25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연합국이 후퇴하면서 갈리폴리전투는 오스만 제국군이 승리하게 된다. 연합국 측에는 역사상 최악의 삽질 전투로 남겨되며 처칠의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반대로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의 승리로 본토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지휘한 케말 파샤는 이후 이순신 같은 국가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1차세계대전 이후 터키 독립 전쟁을 이끌게 된다. 케말 파샤는 오늘날의 터키를 건국하게 된다.
참고
- https://en.wikipedia.org/wiki/Gallipoli_campaign
- https://www.youtube.com/watch?v=g1CpIl_pW20
- https://www.historyextra.com/period/first-world-war/gallipoli-what-went-wrong-ww1-campaign-why-fa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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